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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노르웨이로 가게 됐나.
“고향이 충남 천안인데, 6·25 전쟁 와중에 가족과 생이별하고 미군부대에서 심부름을 하는 ‘하우스 보이’로 일했다. 17살이던 1954년 허벅지에 폭탄 파편이 박히는 심한 부상을 입어 부산의 한 야전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때 유엔군 의료지원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와있던 노르웨이 의료진이 나를 치료했는데, 차도가 없자 비행기에 실어 본국 병원으로 보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아직도 매주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는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노르웨이에서 젊은 시절 어떻게 살았나.
“공부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호텔 식당에 청소부 자리가 났다고 하기에 배가 고플 일은 없겠다 싶어 취직했다. 조금 타거나 조리를 잘못해 손님에게 낼 수 없게된 음식을 먹으며 이를 악물고 일했다.”
-현지 방송의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할 만큼 요리사로 성공했다는데.
“청소 일을 성실히 했더니 요리사들이 대견해 하며 학교에 가게 해줬다. 4년제 요리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친구와 스웨덴으로 놀러 갔다가 사고를 당해 하루를 빼먹은 것 말고는 개근했다.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프랑스에 유학할 수 있는 장학금도 얻었다.”
-프랑스에서 요리를 배웠나.
“요리유학은 무산됐다. 사정은 이렇다. 우선 프랑스어를 배우려고 스위스로 어학연수를 갔는데, 현지 일류 프랑스 식당에 감자 껍질을 깎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다른 아르바이트생은 껍질만 깎고 말았지만, 나는 요리학교에서 공부한 경험을 살려 각 요리에 필요한 감자의 종류를 분류해서 전달해줬다. 그랬더니 그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게 해줬다. 경력을 쌓자 원래 일했던 노르웨이 호텔 식당에서 나를 요리 담당 사장으로 스카우트해갔다. 아쉽게도 프랑스 요리 유학은 하지 못했지만, 요리사로서 안정된 길을 가게 됐다.”
-어떻게 노르웨이에서 라면 사업을 하게 됐나.
“요리사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어느 날 고국이 그리워서 한국을 방문하게 됐다. 그런데 서울 뒷골목에 다니다 우연히 들어간 분식집에서 생애 최고의 라면을 만났다. ‘와, 이렇게 맛있으면 노르웨이에서도 통하겠다’ 싶었다. 언젠가 이 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50대가 된 80년대에 라면 사업을 시작했다.
-노르웨이에선 ‘미스터 리’ 상표의 라면이 일본 라면을 제치고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성공시켰나.
“별거 없다. 잘 되리라는 믿음과 잘 되게 하겠다는 노력뿐이었다.”
-노르웨이어는 물론 영어·프랑스어는 물론 독일어까지 유창하다고 들었다.
“영어는 어려서 미군부대에서 일하면서 배웠고, 프랑스어는 아까 말했듯이 스위스에서 연수를 했다. 독일어를 배운 것은 사랑 때문이다. 독일 여성과 9년 동안 펜팔을 하면서 익혔다. 그 뒤 그녀가 부모님을 모시고 노르웨이로 휴가를 왔을 때 처음 만났는데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고, 당시 동행까지 했다. 속이 탔지만 어려서 한국에서 어르신께서 하신 ‘여성의 마음을 잡으려면 그 부모에게 잘 하라’는 말이 생각나서 그렇게 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다. 얼마 뒤 그녀가 ‘약혼자와 헤어졌다’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 사람이 나의 첫 아내 안네리제다. 84년 세상을 떠났다. 아냐(41)·소냐(37)·이리나(32)의 세 딸을 뒀는데 각각 의사·요리사·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모두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나는 딸들이 하도 성화를 해 한국 여성과 재혼했다.”
-‘리틀 노르웨이’‘리틀 코리아’ 사업은 어떤 것인가.
“노르웨이촌, 한국촌을 만들어 한국과 노르웨이의 상호이해와 교류를 촉진하는 일이다. 인천에서 ‘리틀 노르웨이 타운’ 건설 사업에 착수했는데, 우선 노르웨이 근해에서 잡은 연어·대구·고등어·골뱅이를 가져와 보관하는 냉동창고 사업부터 하고 있다. 노르웨이가 중국 칭따오에 창고를 개설하려던 것을 인천으로 돌렸다. 한국 사업가들이 우물쭈물하다 좋은 해산물을 일본인에게 놓치는 경우를 봤기 때문이다. 일본 상인들은 좋은 물건이면 돈을 더 얹어주고 다 사들인다. 안타까운 마음에 이 사업을 하게 됐다. 앞으로 노르웨이에서 ‘리틀 코리아’도 시작할 예정이다.”
-소원이 있다면.
“나를 낳아준 곳은 한국이고 나를 길러준 곳은 노르웨이다. 두 나라 모두 나의 고국이다. 여생을 고국을 위해 바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