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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퍼왔어요..]빚 삼천만원부터 시작한 인생

SOLAR TRADE 2007. 8. 3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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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게시판을 뒤지다가 오래전 귀한글을 건졌네요 혼자 넋두리 하고 이글보고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도 힘 얻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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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삼천만원부터 시작한 인생입니다.(상)


내 나이 20살 무렵에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군에 입대.
그때 제 나이 20 살 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 (아니. 가족모두의 재산이라고 해야 옳겠군요)의 재산은 서울에 32평짜리
아파트 한 채. 분당에 같은 평수의 아파트 한 채. 땅과 건물. 지방과 서울에 두 개의 아버지
사업체.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20 억이 조금 넘는 재산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고생모르고 가난이란 것도 모른 채 군에 입대했고 전역하면 아버지 사업체 중
하나를 이어받아 노후까지의 삶이 마치 운명처럼 계약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또 하나의 운명은 그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의 결혼이었죠.
여자 쪽 부모님도 그렇고 우리 쪽 부모님도 서둘렀기 때문에 전역 후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었죠. 그렇게 군에서의 전역을 앞둔 말년휴가를 나온 시점부터 내 삶은 조금씩
벼랑 끝으로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채…



부모 복 없고 형제 복 없다는 점괘
제겐 3 살 위의 형과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저까지 네 식구가 살고 있었고 가끔 재미로 점
을 보거나 역학을 보면 항상 제 밑에 동생이 하나 더 있을 텐데…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
니다.
부모 복 없고 형제 복 없고 오직 아내복과 재산복만 있다고 나오더군요.
비웃었었죠. 부모가 저렇게 재산이 많고 형은 젊은 나이에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면서 탄탄대로로
달리고 있는데 부모 복 형제 복이 없다니… 순 엉터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게 현실이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습니다.
말년 휴가 때 뭔가 집안에 일이 있음을 눈치 챘고 마침내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 형과 저
를 불러 앉힌 채 10 년 동안 함구해야만 했던 무거운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막내인 제 밑으로 아홉 살 된 배다른 동생이 있고 아버지는 두 번째 부인이랑 아파트를
얻어서 십 년째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하나는 사업도 땅도 건물도 그리고 우리가 살
고 있는 이집도 모두 빚에 넘어가게 되었다는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나를 바라봅니다.
그리곤 어머니와 이혼을 합의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제게 남겨줄건 빚 삼천만원 뿐이라고…
아버지는 두 번째 부인에게 얻어준 아파트에서 살게 될 거라고… 형이랑 같이 어머니 잘 모시라고.
아직도 난 그날 거실에서 일어서 제방으로 들어와 피워 물었던 쓴 담배 맛을 기억합니다.
곧 아버지는 안방에서 짐을 꾸렸고 어머니는 주방에서 멍한 동공으로 앉아있고 머뭇거리다 현관을
나서는 아버지의 옷가방을 가지고 전 아버지를 배웅했죠.
만일 그 후의 내 삶이 얼마나 벼랑 끝으로 내 몰릴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전 아마 그날 아버지
멱살을 움켜쥐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한 달 후.
어머니 친척의 도움으로 경기도에 복도식 낡은 아파트 18 평짜리 전세를 얻을 수 있었고 창고 같은
제 방에 누워있으면 기차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땐 그 소리가 얼마나 싫었는지 잘 때 마다 귀를 틀어
막을 정도였으니…. 아련하게 들려오다 점점 커지고… 그리곤 다시 아련해지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
는 내 삶처럼 더 이상 저 소리는 제게 정겨운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23.
수입이라고는 제가 월급쟁이하면서 받는 월급 80 만원과 어머니가 일용직으로 벌어들이는 수입
30 만원. 그리고 아버지의 회사에서 고생모르고 일하던 형은 아버지의 사업부도와 부모님의 이혼
후 방황을 시작했고 700 전화로 집 전화 50 만원을 써대고 어머니가 일용직으로 하루하루 벌어들
이는 몇 만원의 돈을 뜯어 나가는 악마 같은 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벌지 않으면 집에 쌀이 떨어진다는 것도 그때 알았고 2 년 후에 전세금을 올려주지 못하면
길거리에 내 앉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친구가 제게 이별을 말하더군요.
창피한 이야기지만 울며 사정했습니다.
헤어지더라도 지금은 아니라고….
내가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을 때 그때 떠나면 안 되겠냐고….
하루에도 수 천 번씩 죽고 싶은 마음 겨우 너 때문에 다스리고 있다고….
여자라는 존재… 정말 냉정하더군요.




가난한 남자친구가 싫은 여자친구...



가난한 사람은 싫답니다.
모두 가난에서 벗어날 줄 알고 살지만 결국 죽을 때 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이제 겨우
살만하다 싶으면 그때는 다른 사람들이 저만치 앞서 가있고 결국 가난은 지울 수 없는
형벌이라고…. 그날 여자친구가 바닥에 내던진 호출기의 부서진 조각들을 전 아직도 간직
하고 있습니다. 슬퍼하고 싶은데 받아줄 이 없고 힘들다 소리 지르고 싶은데 들어줄 사람하나
없는 혼자라는 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지만 문을 닫으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고… 전 그렇게 닫혀 진 내 사랑의 문에서 돌아선 채 또 하나의 문을 열기시작 했습니다.
날 독하게 만들어준 빌어먹을 첫사랑에 감사하며….




다시 시작 된 제 인생.
회사에서 퇴근하는 시간이 평균 밤 8 시.
퇴근 후 아침 출근길에 옆 식당에 맡겨두었던 제 어깨를 함몰시킬 만큼 무거운 가방을 찾아서
집으로 가는 길을 다시 돈벌이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따리장수.
버스로 가기에도 지루한 거리를 엄지발가락 사이에 물집을 실을 넣어 터트릴 만큼 걸으면서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이나 아가씨들이 보이면 가방을 열고서 거리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머리 삔. 헤어밴드. 타 공 목걸이. 지나가는 아저씨들이나 제 또래 남자들이 보이면 가방을 열고
서 핸드폰 줄, 이어폰, 핸드폰 케이스 들을 풀어헤치고 장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세달. 종아리에서 못 보던 핏줄들이 새로 생겨나고 엄지발가락 사이엔 항상
대일밴드가 자리하고 그래도 기뻤습니다. 그것도 장사라고 차츰 넥타이를 맨 보따리장수라는
닉네임이 거리의 사람들 틈에서 붙기 시작했고 수입도 늘어나 본업보다 더 좋은 수입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그 감격들은 지금 그 몇 배의 수입을 벌어들이면서도 맛볼 수 없습니다.
때론 카센터 에서 고스톱 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장사를 하러 갔다가 돈을 잃은 사람이 보따리를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카센터 마당에 흩어진 악세사리들을 주워 담고 있는데 카센터 개가 물고
도망을 가더군요. 찾으려고 쫒아가고 뛰어다니는데 카센터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더군요.
가방을 내려놓고 일어서 가방을 걷어찬 사내의 멱살을 움켜잡았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눈물
만 흘렀답니다.
차를 고치러온 경찰은 내게 끝까지 반말을 해대며 나가라고 떠밀고…




절 떠난 첫사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더군요.
가난은 죄이며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무서움이…
두려움이… 저를 옭아매고
그날 미친놈처럼 눈물을 흘리며 덕소 뒷산 길들을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중엔 울다울다 악에 받치니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뛰던 것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쿵쿵 뛰게
되더군요. 미친놈처럼 울다가… 미친놈처럼 웃다가…
내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며 차라리 죽자고 소리치고…
(떠올리니 또 눈물이 고여 버리네요.)
집안이 무너지던 날 그렇게 내 첫사랑도 그리고 나 자신도 모두 나를 버렸습니다.
악마 같은 형은 돈을 주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집에서 산적처럼 씻지도 않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며 낄낄대고 어머니의 찌들어 가는 모습은 점점 날 구석으로 몰아가고 전 평일이면 퇴근길에
주말이면 공사판과 유흥업소 들을 돌아다니며 보따리장수.
나중엔 제법 자리를 잡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렇게 3 년을 살며 제겐 제법 많은 돈이 모였습니다.





빚 삼천만원부터 시작한 인생입니다.(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월급쟁이로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내 모든 것을 걸어보겠다고….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돌아서면서 제 두 번 째 사랑이 시작되었고
여자는 제가 다니던 작은 회사 사장님의 하나뿐인 딸이었습니다.
대학졸업 후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했던 그 애가 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 애의 고백을 이런 식으로 사직서를 내는 날 듣게 될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전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성공할 때 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모두 아니라고 하지만 나 꼭 이 가난에서 벗어나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날 다독여줬던 그녀는 지금의 제 와이프 입니다.

처가 집과 우리 집의 형편이 너무 많은 차이가 있어서 반대가 심했지만 절 믿어준 와이프는
가출까지 하는 고집을 보여주더군요.

사직서를 던지고 가진 돈을 끌어 모으고 약간의 은행대출.
그리고 덕소를 벗어나 서울로 다시 이사 오면서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




드디어 저의 제 2 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소매로 시작했던 사업은 겨우 겨우 현상유지만을 해오다 눈을 돌려 도. 도매를 시작했고 정보가 느린 사업자들에게 원가보다 저렴하게 입고할 수 있는 물건들을 납품하기 시작했습니다.




[움직이고 현장에서 느끼고 업자를 주목하라.]
[정보는 곧 돈이다. 부지런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게으른 자가 있으며 게으른 자는 부지런한 자의 정보를 돈으로 사들일 것이다.]
[소매는 사업의 전부가 아닌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이며 도매로 입고된 모든 상품은 정보가 느린 사업자들에게 도. 도매로 재활용하라.]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소자본으로 창업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이론들을 학습하려 했지만 결국 그 이론들은 사
업시작부터 닥쳐오는 변수들에 의해 깨져나가고 스스로 습득한 절대이론은 스스로 만들어냈던
위의 4 가지 문구뿐이었습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사업은 월평균 칠백만원이상의 이윤을 내며 달리기 시작했고 전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빚을 모두 갚고 작은 집을 사는데 까지 걸린 시간은 또 3 년.

그리고 지금의 와이프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 29.

이제 고생은 끝났나 싶었는데 끝내 악마 같던 형이 사고를 치더군요.
단 한 번도 일을 하지 않던 형의 지갑에서 발견된 수많은 현금다발.
그리고 형방 장판 밑에서 발견된 사채 빚 서류들과 캐피탈 서류들.
그날 저녁 형은 제게 사채 빚 이천만원과 캐피탈 이천 오백만원.
개인 빚 팔백만원을 이야기 하더군요.

이거 못 갚으면 자기 죽을지도 모른다고 이자는 계속 늘고 집에는 깡패들이 찾아오기 시작하고….

부자는 독해야 한다고 하는데 전 부자가 될 팔자는 아니었나 봅니다.
차라리 제가 나가서 고생을 다시 하는 한이 있어도 형이 깡패들에게 맞고 쫓겨 다니는건 생각도
하기 싫었고 형을 믿고 싶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도 없는 마당에 형마저 없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형의 빚을 이자를 제외하고 모든 원금을 갚아주었습니다.
비로소 웃어 보이는 형.
그날 형은 모처럼만에 어린 시절 온 가족이 함께 살 때 새벽에 어른들이 깨지 않도록 까치발을
들고서 주방에서 제게 해주었던 비빔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깍두기를 넣고 콩나물을 넣고 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제게 밥그릇을 건네며 웃는 형의 얼굴을
보고 전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사랑을 떠나보냈던 아픔도 가족들에겐 숨겼었는데….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 한번 하지 못하고 나만 믿으라고…
이 막내를 믿으라고 웃어보였었는데….

영문도 모른 채 절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와 형을 앞에 두고 전 그렇게 긴긴 시간 목 놓아 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날 형이 만들어준 비빔밥을 다시 한 번 먹어 볼 수만 있다면….
어린 시절 형이 만들어주던 맛있는 비빔밥을 다시 한 번 먹어볼 수만 있다면 어쩌면 전 제 모든
것을 다시 형에게 아낌없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형은 캐피탈에서 이백 만원을 끌어 쓰고 집 주소와 제 핸드폰 번호를 캐피탈에 남기
고는 떠나버렸습니다.
제 명의로 산 핸드폰 요금 백 오십 만원을 연체시킨 채….

살아있는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살아있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이 썩어 문드
러진 마음을 누가 알아줄지….

그렇게 오랜 시간 저를 지켜만 보던 와이프가 조용히 절 바라보더군요.
오빠…
그만큼 식구들에게 했으면 이젠 할 만큼 한 거라고…
이젠 오빠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만 살자고….

그 후부터 전 아버지도 형도 보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사업은 잘 되었고 형에게 주었던 돈들도 2 년 동안 벌어서 모두 채워 놓았을 때…

그때가 제 나이 31 살.
그러니까 작년이네요.
비로소 안식을 찾은 저는 웹상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어느 날 한 출판사에서 전화가 오더군요.

이번 공모전에 응모해 보라고….
응모를 했고 전 우수상을 타며 상금과 작가라는 타이틀 그리고 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 년 동안 쏟아지는 기업들과 출판사의 콜.
투 잡 을 넘어 쓰리 잡 까지 하고 있는 지금.
전 일억 오백짜리의 작은 집을 한 채 소유하고 있고 직접 운영하는 매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참. 그리고 이번 해 5 월엔 제 아들도 태어났으니 정말 큰 재산이 하나 더 불어난 셈이네요.
마지막으로 가난한 시절 저에게 좌절을 줬던 카센터에 새로 뽑은 차를 가지고 갔더랬습니다.

종업원들은 바뀌었지만 주인은 그대로더군요.
폼 나는 양복에 현금다발을 들고 새로 뽑은 자동차를 끌고 들어가서 내가 그 옛날 당신이
패대기쳤던 가난한 보따리장수였노라고 말하니 기억을 못 하는 건지 머리만 긁적이더군요.
그 개가 있으면 한대 쥐어박아줄라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고단할수록 희망의 그림을 그려보세요.
모든 것을 잃고 빚 삼천만원 부터 시작한 인생이었습니다.
제가 정말 드리고 싶은 말은 마음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가진 이 돈이 정말 부자들에겐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돈이라고 하냐? 하고 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앞으로도 더 많은 세월을 살 것이고 그 세월은 절 더욱 부유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신 모든 분들께 정말 님들을 믿고 계신 부모님과 아내에게 믿음직스럽고
자랑스러운 남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좌절은 한번만 하십시오.
그리고 희망을 꿈꾸십시오.

마음이 고단할수록 희망의 그림을 그려보세요.
그린만큼 현실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가난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형벌이 아닙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좌절하는 나약한 마음이 바로 형벌입니다.

빚은 갚으라고 있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좌절하거나 자살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당할 수 없는 빚도 결국 여러분의 귀중한 가치보다 더 절박할 수는 없습니다.
아프기도 전에 포기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라도 마지막에 웃어 보일
수 있는 감동스러운 삶은 바로 여러분이 그려가는 것입니다.(끝)



* 당신이 선 그 자리에 당신은 늘 최고입니다 *

 

후...나도 빨리 행동으로 옮겨야 되는데...ㅠ

출처 : 세이노의 가르침 ^^*)
글쓴이 : 어느멋진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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